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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장영실 생애와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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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경상도 동래현 관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어머니에게 글을 배우고 어린나이에 관청의 노비로 있었습니다.

그가 언제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충남 아산에 장영실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전통적으로 농업국가

였던 조선에서는 농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천문학이 매우 중시되었을 때입니다.세종때 이런 관심이 잘 반영

되었고 장영실은 천문학관련 여러가지 발명품을 만들게 됩니다.장영실과 세종대왕의 만남은 우리나라 과학발전에

시초로 남겨지고 있습니다.장영실이 태종때부터 궁중기술자 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세종이 발탁해서 관직을

받고 궁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지만 장영실이 두각을 나태낸것은 세종대왕때부터 입니다.세종대왕은 많으 

사람이 알다시피 신분의 높고 낮음을 신경 쓰지 않고 나라의 인재를 끌어오는 정책을 펼치는데 이때 동래 관찰사가

장영실을 천거하여 노비였던 장영실은 꿈도 꾸지 못햇던 세종대왕을 만나게 됩니다.장영실을 만난 세종대왕은

여려 일들을 통해 장영실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고 1421년 최군구,윤사웅과 함께 장영실을 명나라로 유학을 보내

천문기구들을 살펴보고 돌아오게 했습니다.세종대왕은 그런 장영실을 더욱 아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에게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내리게 됩니다.여기서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및 군중의 일용품을 담당하는 관청이였고,

장영실은 이때 노비신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장영실의 업적은 과학적인 기술 측면에서 다양한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으며,그의 발명품은 갯수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습니다.장영실의 발명품 중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물시계는 중국에서 이미 개발이 되어

있는 물시계를 모방해서 만들어 졌습니다.물시계 이후로 천문쪽에 연구를 몰두하게 되면서 천체를 관측할수

있는 혼천의와 해시계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으며,자동 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와 자격루를 만들어서 조선 시대의

과학 발전을 도모하게 됩니다.장영실의 발명품중에서 자격루는 다른 나라에서 볼수 없는 독보적인 발명품 입니다.

지금의 알람 시계처럼 특정 시간이 되면 징이나 북을 치면서 자동으로 울릴수 있는 발명품 입니다.현재 남아있는

자격루는 보루가자격루만 남아 있으며 덕수궁에 있습니다.세계최초의 비를 측정하는 측우기 등 이밖에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발명품을 개발하고 세종의 신임도 얻은 장영실이었지만 불운의 사고로 몰락하게 됩니다.세종 24년

세종의 온천행을 앞두고 장영실은 세종이 타고 갈 가마 제작을 감독합니다.그과정에서 장영실은 가마가 견고하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햇지만 함께 감독을 담당한 대호군 조순생은 가마가 부서지는 일은 없다고 우기며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하지만 3월16일 시험운전중 가마는 부서집니다.그결과 장영실은 세종에게 내쳐지고 의금부로

끌려가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그토록 신임하던 장영실이었으나 세종은 끝내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앗다고 합니다.장영실이 궁에서 떠나면서 그의 발명품을 고칠 기술자가 없엇다고 합니다.그에 따라 자격루는

1455년부터 15년 동안이나 고장으로 사용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궁에서 떠난 장영실은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알수가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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