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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유신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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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본관은 김해이며 만노군에서 태어났습니다.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12대손이며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증손입니다.조부인 김무력은 구해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으며,백제의 동북지역을

점령해 신주를 설치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시도 했습니다.부친은 소판의 벼슬을 지낸 김서현

으로 그도 대량주 도독 등을 지내며 진평왕때에 백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활약을 했습니다.삼국유사에서는

김유신이 일곱 별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김유신은 수많은 전장

에서 싸워 마침내 신라를 최후의 승자로 만드는데 공헌을 했습니다.명실공히 신라의 대영웅으로 한국사에서 

왕족이 아님에도 사후 왕의 자리까지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김유신이 활동한 시기의 신라는 진흥왕의

전성기가 긑나고 반복되는 실정과 외교적 고립 신라 내부의 반대 세력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런

신라를 존속시킨 핵심 인물로 넓게 보면 향후 수천년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중 한명입니다.또한 장수의

이미지가 강해서 묻히기는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영향력도 결코 적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김유신은 629년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때 큰 공을 세우면서 무용을 떨치기 시작합니다.당시 아버지인

김서현을 따라서 중당당주로 참전했던 김유신은 신라군이 패전의 위기에 몰리자 적진으로 용감히 쳐들어가 적장을

죽여 신라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ㅂ니다.642년 백제가 대야성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압박해오자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임명되었습니다.이듬해에는 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해오자 상주 장군으로 임명되어 다시 출전하여 백제군을

패퇴 시켰습니다.647년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김유신은 진압에 성공하며 공을 세웁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왕이 머물던 월성에 큰 별이 떨어져 병사들이 동요하자 김유신이 한밤중에 불붙인 연을 하늘로

띄워 별이 다시 하늘로 오른 것처럼 꾸며 병사들의 사기를 복돋은 뒤에 반란군을 진압햇다는 이유기가 전해 집니다.

그해 겨울에는 백제가 무산성을 공격해오자 방어에 나서 수하인 비녕자의 활약으로 백제군을 물리쳤습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신라는 648년 김추춘를 당나라로 보내 원병을 요청햇는데 당나라 태종은

파병을 약속합니다.압량주 군주로 있던 김유신은 그해에 대야성 수복에 나서 옥문곡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 잡습니다.그공으로 김유신은 이찬의 벼슬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으로 임명 됩니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은뒤 원래는 알천이 왕으로 추대 되었으나 김유신은 알천과 상의해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를

왕으로 세웁니다.그리고 655년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조를 아내로 맞이하고 백제의 도비천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둡니다.이때 백제에 포로로 잡혔던 급찬 조미압을 통해 백제의 내정을 자세히 파악하고는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추진합니다.660년 소정방 유백영 등이 이끌고 온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사비성을 점령하며 백제를 멸망 시켰다.

백제가 명망한 뒤에 당나라는 사비성에 계속 주둔하며 신라를 침공하려고 생각하였지만 김유신은 다마공과 함께

백제인으로 위장해서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계책을 냅니다.그러나 이러한 동향을 알아차린 당나라는 유인원이

이끄는 일부 병력만 남기고 철군 합니다.무열왕은 백제의 병합에 기여한 공적을 높이 치하해 기존의 17등급 작위

위에 대각간이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김유신이게 주었습니다.김유신은 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에 나서자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신라군을 이끌고 출병합니다.김인문 등과 함께 평양성

인근으로 진군해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공 합니다.663년 백제의 잔존세력이 왜인과 함께 두솔성 임존성 등지에서

부흥 운동을 펼치자 이를 집압하기 위해 출병합니다.664년 김유신은 70세의 나이로 은퇴를 요청했지만 문무왕은

허락하지 않고 대신 은퇴를 거부하는 의미로 지팡이 궺장을 하사 했습니다.이 기간에 사비산성에서 백제 저항

운동이 있었고 진압 되었습니다.고구려 정벌이 끝나고 기존에 가장 높았던 대각간직 위의 태대각간직을 새로 

만들어 임명 되었습니다.김유신은 673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문무왕은 그의 죽을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비단 1천 필과 조 2천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 주었습니다.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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