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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대조영 발해건국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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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은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중상의 첫째 아들로 어릴때 부터 용맹함은 물론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며 공평하고

무예 또한 뛰어났습니다.고구려 신분에 따른 교육 기관인 태학에 대해서도 배울수 있었는데 태학은 인재 양성을

통해 유능한 신하들을 길러 내어 왕권을 강하는 것이 목적입니다.그런데 태학에서 공부하여 큰사람이 되고자 했던

대조영은 고구려를 이끄는 귀족들이 고구려를 지키려는 마음은 없이 자신들의 안위만 적정하는 모습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대조영은 자신의 생각을 소신있게 밀어 붙히는 강직한 성격이였습니다.그후 나.당

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중상을 비롯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끌려갑니다.당은 고구려가 일어서지  못하게

고구려인들을 사방 각지에 흩어 놓습니다.당나라의 민족 분열정책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들에게 동족 의식을 강화

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당으로 가는 행렬이 요하의 서쪽 영주에 머물러 농사를 지으며 겨우 살아갈때 흉년이

들어 이진충과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인들이 관아에 불을 지르며 항의하면서 당나라 군사들과 싸움이 벌어지자

말간인과 고구려인들도 들고 일어나 싸웠습니다.이것을 시작으로고구려가 망한지 30년 만에 고구려 장군 출신으로

뛰어난 용맹과 리더쉽으로 영주에서 대조영은 거란인 이진충과 함께 당에 반기를 들었습니다.당이 중앙에서

측천무후 등이 불러 일으킨 권력투쟁이 거듭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악화되자 주변 각지의 종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그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
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습니다.이에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대조영은 거부 하였습니다.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뒤 추격군을
파견 합니다.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자 걸사비우의 말갈족
집단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합니다.그러자 대조영은 휘하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날아나면서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등을 규합합니다.당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와 휘발하의 분수령인 장령자 부근에 있는 천문령에서 그들과 맞아 싸워 그케 승리합니다.그뒤 계속 동부
만주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인 동모산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합니다.698년에 국호를 진,연호를 
천통이라 하였습니다.제1대 고왕으로 추대된 대조영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조직을 정비하고 성벽을 세우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집니다.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수 있는 농토를 마련하여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돌궐,거란 등 당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주변 부족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지난날 고구려를 멸망하게 
만들었던 신라와 당과도 화친을 맺으며 나라의 힘을 기릅니다.

발해는 대조영때 이미 랴오둥 지역을 비롯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을 이루었찌만 피지배층 다수는 말갈인입니다.대조영 역시 말갈 계통의 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화
된 임물입니다.2대 무옹 때는 동북방의 여려세력을 복속시켜 압록강 중류와 송화강 유역에서부터 동북부 연해주에
이르렀습니다.세력확장과 당과 일본등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력가지 강해져 해동성국이란 이름까지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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