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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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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최대 변곡점은 인천상륙 작전이었습니다.김일성의 남침 이후 국군과 미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렸습니다.이렇게 밀려난 곳은 낙동강 전선이었습니다.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기에 국군과 미군이 싸우고 있는 뒤에는 남해 바다가 있었고 앞에서는 어떻게든 8.15일 까지 전쟁을 끝내라며

다크치는 길일성의; 독전 명령에 따라 공세를 늦추지 않는 북한군이 있었습니다.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죽는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디.해외 망명정부를 수립 하던지 아니면 남해 바다에 수장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다 죽느냐의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하지만 정부와 국군은 한치에 꺼리낌도 없이 후자를

선택 합니다.이때 유엔군 총 사령관이 바로 맥아더 장군이였습니다.맥아더 장군이 생각을 했을때 부산에서 뭘

하게 된다면 적의 주력부대가 너무 강하다 보니 아군한테 피해가 막심할거라고 생각을 하여 고민을 해보니 은밀하게

남해와 서해를 돌아 인천으로 가는 인천상륙작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을 선택한 이유는 서울이랑 가깝기 때문 입니다.서울이랑 가까우니 서울을 되찾으면 수도를

회복하게 되는거고 아무래도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도로를 차단해 버리면 북한

에서 공급되는 식량이나 군사물품 공급도 힘들게 되니 타격이 크게 되기때문에 인천상륙 작전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 합동창모 분부 및 유엔에서는 장군의 이 작전을 반대를 했습니다.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간추려 보면 우선 인천으로 상륙을 하게 될때 수로가 너무 좁다는 이유가 제일 대표적이 였습니다.260척이 넘는

배를 이끌고 빠르게 가야하는 부분이 있어서 였습니다.또 다른 이유는 조수간만의 차이로 상륙시간이 계속 제한이

되서 반대를 한 이유도 있습니다.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성공할  확률이 오천분의 일 말도 안되는 숫자라며,

어떨게 성공을 하겠냐며 맥아더 장군을 설득하려 합니다.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그래서 내가 고집을 하는거다.

확률이 낮기 때문에 라고 말씀 하셧다고 합니다.적들도 방심을 할것이라며 항구에 수심이 제일 깊을때를 계산

해서 9월 15일 밤 12시로 정하게 됩니다.이때 놀랍게도 작전을 펼칠 시간은 단 2시간 뿐이였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미 해병대의 작전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될 미 7사단 1개의 연대를 부산

앞바다에 대기를 시켯다가 낙종강 전선이 위험해 지면 바로 투입하자는 것이였습니다.다음은 미 7사단의 부족한

병력은 한국 학생과 장정으로 메웠습니다.미군속에 한국군 으로 알려진 카투샤다 인천 지역에 대한 북괴군의

정보는 우리 해군에 맡겨 졌습니다.곤ㅝㄴ일 해군 총장은 맥아더 사령부로 부터 인천상륙작전에 정보 수집을 

전달 받고 즉각 시행에 옮깁니다.인천상륙작전에는 한국 해병대와 육군 17연대가 참가합니다.해병대는 통영

상륙작전에서 뛰어난 용맹으로 귀신 잡는 해병 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조직이었고 17연대는 화령장 전투에서

북한국 2개연대를 궤멸시켜 부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을 받았던 육군부대 였습니다.상륙작전은 당일 우리

해군함정 15척도 다른 유엔군 7개국 함정과 함께 당당히 참전합니다.모두 261척 이었습니다.작전은 대성공을

거두며 인천을 되찾고 서울을 탈환하게 됩니다.그 선봉에는 국군 해병대와 육군 17연대가 있었습니다.북한군의

철옹성 같았던 닥동강 전선도 인천상륙잔전의 성공으로 맥없이 무너지며 낙동강 전선에서 대박격이 시작 됩니다.

이 모든것이 맥아더장군과 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뜨거운 피와 땀을 받친 우리 군인들이 일궈낸 쾌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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