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백범 김구선생의 중요 업적과 생애

반응형

백범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에서 출생했습니다.김구선생은 조상의 계급으로 따지게 되면 양반의 자손이었지만

그가 태어날때에는 농민에 자식으로 태어낫다고 합니다.김구선생에 부모는 아이가 어린 나이에도 똑똑하다는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 일찍이 글을 가르쳤습니다.어린나이때부터 김구선생은 글을 통하여 깨우침을 얻고 자신의 

일생을 우리나라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을 합니다.김구선생은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학문을 배우게

되고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임명받아 병사들을 지휘했지만 선봉장으로 성공하진 못하여 청으로 가 의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1895년 일제가 궁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쓰치다를 김구선생이 죽여서 국모를 잃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습니다.하지만 이사실이

알려지자 일제에 의하여 김구선생은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고종 역시 이에 응했다고 합니다.하지만

김구선생의 살해과정을 알게된 고종은 김구의 사형을 취소하고록 하였습니다.1898년3월 인천감리서에서 탈옥을

감행합니다.탈옥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다니면서 동지들을 사귀며 은신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김구선생은 20~30대 청년기중 7년을 옥중에서 보냈습니다.김구에게 옥중생활은 민족 지도자의 소양과 내면을

성숙시키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옥중에서 오히려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다지는 결의로 일제의 호적에서

이탈한타는 뜻에서 이름을"구"로 바꾸고 호를 백정과 범부도 애국심이 자기만 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백뱀"

으로 바꾸었습니다.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김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에대한 일제의 감시가 점점

심해지자 이에 김구는 감시를 피해 상해로 떠납니다.당시 상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문지기를 자청하였으나,임시정부는 국내의 김구 활동을 높이 평가

하여 경무국장으로 임명합니다.김구는 약3년여 동안 경무국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 주요 인사를 보호하고 일제

밀정을 찾아내 실득하거나 처단하면서 임시정부를 수호하였습니다.1922년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독립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활동 합니다.

1931년 항일 무력활동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저직하여 1932년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거,상하이에서 일왕 생일축하식장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거를 지휘하였습니다.이와같은 의거는 우리 민족

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심어주엇고 지지부진하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당기고 중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됩니다.1933년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

했습니다.1938년 임시정부가 옮겨간 중국 창사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돌립운동 세력의

함당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모임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으로 가슴에 총상을 입습니다.다행히 총알이

심장 앞에서 멈춰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습니다.1939년 김원봉과 주우합작에 합의하며 성명을 발표하였고,1940년

만족진영 3당이 통합하여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 위원장에 선출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과

광복군 통수권자를 겸임하게 되었습니다.1941년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하고,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습니다.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총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였습니다.


김구선생은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었습니다.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고 11월 환국

하였습니다.임시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돌릭당 위원장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탇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했습니다.1946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부리치고 북행길에 올랐습니다.

1949년 6월26일 김구 선생은 현역 육군 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인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 하였습니다.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되었으며,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