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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최무선 화약과 화포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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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최무선에 대해 일찍부터 병법에 관심이 많았고 왜구를 제압하는 것은 화약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화약 개발에 나섰다고 합니다.당시에 송나라 등지에서 화약무기와 화포가 개발되어

묵로 쓰이고 있었는데 최무선이 화약 더나아가서는 화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대체로 중국 상인이나

지나가는 외극인의 이여기였다고 합니다.어렸을때 불꽃놀이를 보고 자기도 폭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 최무선의 일가는 정부에도 입김을 넣을 수 있는 거대한 상인 가문이었던ㄱ섯 같습니다.여튼 

최무선은 당시 대왜구시대에 고려 백성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화약 나아가 화포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록을 보면 1356년 왜구와의 전쟁에서 화약을 써서 화살이나 포탄을 날리는 무기인 화통이나 불확살을 사용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에는 화약을 직접 제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중국의 화약을

수입하여 사용하였습니다.왜구의 침입이 잦던 1373년 공민왕은 명나라에 화약을 보내줄 것을 요청 하였습니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전쟁무기인 화약을 내어주는 것은 그리 못마땅한 일이였습니다.때문에 화약을

명나라에서는 화약의 원료인 염초인 유황만을 고려에 보냈습니다.원료를 가지고 있어도 배합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인

것을 계산한 것이였습니다.하지만 이것을 해결한 사람이 바로 최무선 장군이었습니다.최무선은 중국의 이원이라는

염초 제조기술자를 찾아가 화약기술을 배우고 많은 실험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화약 제조 기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최무선은 진포에 쳐들어온 왜구들을 상대로 부원수로 출진하여 자기가 개발한 화포를 가지고 왜구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습니다.이후 태조 이성계는 남아있는 온건파를 견제하기 위해 몇가지 수를 쓰는데 그중

하나가 최무선의 화통도감 폐지였습니다.결국 최무선은 몸져누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이 진포해전을 지위한

사람은 고려 수군의 숭장 상원수 나세 장군이고 최무선 장군은 심덕부 장군과 더불어 부원수를 맡았는데 역시

숙장이자 새로운 수군 창설을 주도한 정지 장군이 작전 계획을 입안 하였습니다.이중 정지 장군은 왕조 교체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말년에 큰 고초를 겪었으며 최무선 공도 막대한 경비 소요를 줄인다는 명분 하에 화통도감

폐지되는 등 수난을 겪었는데 여진족과의 갈등으로 북방이 어지러워지자 화기전담부서가 다시 설치최었으며

이때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관여해 개발한 화기의 이력을 절감한 조선 조정의 영향으로 후대로 갈수록 최무선의

명성이 커졌던 것입니다.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에서는 영천 출신으로 한국 최초로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포와 전함 등을 독자 개발해
실전에 사용한 최무선 장군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최무선기념사업회와 영천 문화원이 공동으로 매년
최무선과학축제를 주최하고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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