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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을사오적 5명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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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을사조약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을사조약을 찬성하고 서명한 이를 을사오적이라고 합니다.외부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이지용,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농상부대신 권중현이 을사오적에 해당되는 인물들입니다.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 세력을

꺽었고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격파하게 됩니다.이후 조선의 외교권을 받탈하기 위해 하나의 조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이 조약이 바로 을사조약입니다.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회의에 참석한 각료들을 강압적으로

압박했습니다.압박을 통해 조약에 찬성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당시 고종은 겅강상의 이유로 이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일부 대신들이 회의에 참여를 했습니다.9명의 대신중 5명의 대신은 조약내용 수정 이후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서명을 했습니다.당시 서명을 한 5명의 일물을 왜적에게 조국을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뜻을 담아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그럼 이들이 찬성한 을사조약에는 외교권 포기와 함께 통감부

설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이조약에 찬성하면 조선은 대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통감부는 모든걸

관리 감독하게 되는 거였습니다.


을사오적 5명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우선 매국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완용은 을사오적,정미칠적

경술국적의 지독한 매국노로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이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습니다.이때

그가 벌어들인 돈은 현재의 가치로 400억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이완용이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소유

했던 땅은 여의도 면적의 7.7배에 달했습니다.1920년 후작으로 승급한 이완용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 했다고 합니다.두번째로 알아볼 을사오적은 이근택 입니다.이근택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 부터 훈1등의 자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에 임명 되었습니다.황연의

매천야력에 의하면 그는 항상 일본 신발을 신고 일본 수레와 앉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녔다고 합니다.

현제 용인 민속촌에 있는 99칸짜리의 집이 바로 이근택의 별장이라고 합니다.당시 왕을 제외한 사람이 지을수

있는 가장 큰 집이 99카느이 집이였다고 합니다.이근택은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세번째로는 전주이씨의 왕족이였던 이지용입니다.이지용은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손자입니다.물론 왕족

으로써는 존재감이 없었습니다.이지용은 강제 병합에 협조한 고로로 1911년 은사공채 10만엔을 받았다고 합니다.

10만엔의 지금 현제의 가치는 약 20억원이 된다고 합니다.당시 일본은 조선인 귀족에게 은사공채를 지급했는데

은사공채증원을 받게 되면 원금을 5년에 거치한후 50년 이내로 상환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이지용은 이렇게

나라를 팔아먹은 돈을 도박을 하는데 탕진하였고 59세의 나이로 사망 했습니다.네번째는 박제순 입니다.박제순은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성균관의 후신이었던 경학원 대제학으로 임명되어 친일을 이어 나갔습니다.이후 일본의

총독 정치 옹호 선전을 하여 일본을 유람하다 1916년 사망 하였습니다.박제순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당시로는 드물었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다섯번째는 권중현 입니다.권중현은

충무공 권율의 9대손 아버지와 이순신의 9대손 어머니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는 1908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습니다.욱일대수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수여하는

욱일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이였습니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겁을 먹고 귀족 작위 반납을 신청 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3.1운동이 잠잠해진 후에 다시 친일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권중현은

8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 까지 천수를 누렸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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