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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다산 정약용 주요 업적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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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였습니다.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다산 정약용이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엇던 것은 자기 시개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뱡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정약용은 1762년 진주목사를 역임했던 정재원과 윤선도의 손녀인 해남 윤씨 사이에서 4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그는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 수려한 경기도 양주 마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약용은 부친으로부터 기초적인 학문을 배웠으며 매우 영특햇다고 합니다.4세에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다고 합니다.마현에 터를 잡은 정약용은 서울 출입을 15세에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들면서 부터입니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됩니다.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학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저서를 남긴 사상가입니다.목민심서는 다산정약용 사상의 정수인
1표2서의 핵심이 되는 책입니다.인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요순의 법이라도 실시할 곳이 없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병들어가는 백성들은 급하게 구호한다는 취지로 만든것이며 전라도 강진에서 18년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중
집필하여 완성하였습니다.학문적으로 가장 원숙했을때 정약용 사상의 정수를 담앗던 저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지을때 중심이 되는 역활을 했습니다.정조는 미리 성쌓기에 관련된 책을 구하여
정약용에게 연구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정조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정약용은 서양의 기술적인
서적을 연구하여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는데 큰 공을 들이고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정약용은 이벽,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뚜렷한 활동은 전개하지
않았고 천주교의 교리에 완전히 동의하지 안았으나 학문적으로 접근하려고 했습니다.그러나 이 입교는 정약용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습니다.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인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엇찌만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천주교 교난때 갸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유배를 당하고 완전히
정계에서 배제 되었습니다.18년동안 긴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보내게 됩니다.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그의 나이 57세였습니다.그후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며 실학사상을 집대성
하였습니다.정약용이 가진 국가개혁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습니다.국가개혁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에서
그는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 종합된 개혁사상을 전개합니다.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을 바탕으로 세재,군제,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입니다.다산 정약용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 모두
499권입니다.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저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비록 강진에서의 유배 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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