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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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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하면 생각나는 낙화암과 삼천궁녀 하지만 실제로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그리고 의자왕이 신하의 말을 무시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은 채 그저 여자와 술만 즐기며 왕위를

누린 무책임한 임금이였을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입니다.삼국사기에는 의자왕에 대해서 나라를 망친 임금이라고 비난하고 삼천궁녀들과 놀기만 했다는 글이 

있지만 한편으로 의자왕도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것도 알아주어야 할것 같습니다.의자왕은 나라를 

잃게 되고 당나라로 끌려가 죽기까지 의자왕의 많이 힘들었을듯 합니다.억울함을 호소하는 의자왕의 주장에

대해서 역사속으로 들어가서 그 진실을 알아 보겠습니다.


백제는 국경을 따라 촘촘한 산성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신라의 군령이 사비까지 도달하려면 수많은 산성을
지나야 했습ㅂ니다.그러나 백제의 산성에는 여전히 건제한 백제의 지방군이 있었습니다.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의
18만 대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바로 보급이였습니다.특히 군량 문제가 심각하였고,사비성에서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군량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군량을 조달하는 유일한 길은 신라에게 공급하는 것뿐이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나당연합군이 수도 사비로 처들어오자 다급한 의자왕은 공산성으로 가서
예식과 대비하였고 계백장군은 5000결사대를 꾸려 논산으로 향하였습니다.성을 지키며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왕이 있는 수도를 쳐들어가기 때문에 방어가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야전에서 싸우지 않으면 않되는 상황
이었습니다.계백이 황산벌 결사 항전으로 시간을 다소 늦출 수가 있었을뿐 당나라 소정방은 인천을 상륙하고
부여로 처들어오니 이미 의자왕은 도망치듯 공주로 떠나났고 남아있던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투신
했다는 허황된 소문만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의자왕은 초반 정치외교 군사를 활발하게 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으나
후반에는 사치와 퇴폐적이고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확인 불가한 내용속에서 진실을 알기엔 역부족이라 생각됩니다.


논산에는 계백장군이 신라군과 싸우고 공산성에는 좌평 예식이 있었습니다.하지만 소정방은 부여로 직접 들어온

것이었습니다.이에 의자왕은 지세가 방어하기에 좋은 공주로 가서 예식과 함께 당의 소정방과 겨려볼 요량으로 

하였으나 좌평 예식은 계백이 전사하고 수도 부여가 적의 손에 넘어가자 아마도 소정방에게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660년 백제는 그렇게 멸망을 하고 당나라의 지배를 당분간 받게되고 그후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유민은 1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일년을 살다 죽었고 아들 융과 예식진

흑치상지 그리고 많은 유민들은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 백제부흥을 꿈꾸듯 열심히 살았고,당나라 왕의 무덤에서

부여태비라는 묘지석이 발견되어 성씨가 부여인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가 부여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제 마지막 역사의 궁금했던 점을 다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백제는 예식의 배반으로 망했고 이국땅 당나라에서도

인정받으면서 백제인들은 660년의 역사에 종지부가 찍혔음에도 백제인의 긍지를 가지고 타국에서나마 백제

부흥을 꿈꾸며 열심히 살았던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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