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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윤봉길 의사의 일생과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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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인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윤봉길 의사가

10세가 되던해인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윤봉길 의사는 다음 해에 대한민국의 열도에서 유관순

열사의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의 민족정신 영향으로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였고 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윤봉길 의사는 유관순 열사를 본받아서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 계몽운동을 진행하였습니다.일찍이 조선의 패망이 조선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국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셧습니다.무지한 동포들을

깨우치고 윤봉길 의사는 19세에 사랑방에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야학을 개설한뒤 한글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에 힘을 쏟았습니다.이과정에서 농민 독본을 저술 하였습니다.이외에도 부흥원을 설립 농가 부업

장려,토산품 애용과 일본의 물화 배척을 이끌고 월진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민족 계몽운동만으로는 조선의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윤봉길의사는 홀로 중국으로 망명에 오릅니다.

중국으로 망명한 윤봉길의사는 고향에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진 빚을 갚기위해 세탁소에서 일을하시며 독립운동을

위한 기회를 찾고 계셧는데 그 과정에서 김구 선생과 만나게 되었습니다.김구 선생은 당시 조선의 독립 운동의

폭발제로서 역활을 위한 한인 애국단 이라는 특별한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셨습니다.조선의열단만큼 한인

애국단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1932년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처단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선의 독립

운동에는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이후 복잡한 정세가 펼쳐지게 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한인 애국단의 결의는

더욱 강해졌으며 야채장수로 활동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을 처단할 결의와 계획을 세운뒤 홍구 공원에서 육군 대장 시라카와와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 합니다.이처단은 단순한 암살이나 폭살이 아니라 독립 운동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중국의 큰 적으로 특히 시카라와의 경우 상하이 사변 때 토벌군 사령관이

되어 중국 19로군 을 토벌한 인물이었습니다.그를 처단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는 평가를 남기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다음 세대에게 이상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고 깨달았으며

장부가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그 뜻을 이루기 전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그 글과 함께

일본인 장교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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