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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고수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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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수나라는 진을 멸망시키고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후에도 몇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 보았습니다.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통태를 살폈으며 마침내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병 1만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습니다.그러나 임유관을 점령하지는 못하였습니다.그러자 수 문제는

30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598년 7월 장마가 시작되면서 전염병과 식량부족으로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게 됩니다.이전쟁을 두고 신채호는 본래 고구려 군의 활약을 감추기 위해 군사의 수를

100만 대군에서 30만명으로 줄여 기록했다고 한다.그후 612년 양제가 110만명의 대규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로

출병하였습니다.그러나 요동성 전선에서 몇달간 발목이 잡히자 6월에 우문술,우문중,설새웅 등 30만 5천명의

아홉군을 별동대로 조직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진군하게 됩니다.별동대는 100일치의 양식,옷감,무기 등 온갖

물자를 지고 행군을 시작했지만 병사들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몰래 버리는 바람에 고작 압록강에

닿았는데도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됩니다.


이때 을지문덕 장군이 거짓 항복을하며 수나라군의 군영에 들어가 그형편을 엿보았습니다.만약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양제의 밀지를 받았었던 우문술과 우중문은 그를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종군하고 

있던 유사룡이 말린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이내 후회한 우중문이 다시 오라는 것을 을지문덕이

무시하자 수나라군의 정예기병이 추격해 왔습니다.이에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희롱하는 시를 보냈습니다.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다시 회유하기에 약올리득 영채를 불태우고 철수 했습니다.우문술은 을지문덕도 놓쳤고

군량도 다떨어졌으므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우중문이 지금 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볼수 있겠냐고 성을

내며 계속 나아갈 것을 고집 합ㅂ니다.우문술도 언성을 높였으나 이전에 양제가 우중문이 계획성이 있으니 

그의 의견을 경청하라고 하였기에 부득이 따르게 됩니다.압롭수를 건너 몰려오는 수나라군을 을지문덕은 막으려

했으나 하루에 7번 겨뤄 모두 지는 등 화퇴를 거듭하게 됩니다.승리에 도취한 수나라군은 계속 진격하여 평양성

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진을 쳤습니다.7월 수나라군이 살수에 이르러 반쯤 건너자 뒤에서 후군을 공격

했습니다.수나라군은 신세웅이 전사하는 등 여러 부대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달아나기에 급급해

하루만에 450리 거리의 압록수에 닿았습니다.요동으로 되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많은 군수물자와

공성병기는 모두 고구려에 빼았기고 말았습니다.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 들을 쇠사슬로 묶고 총퇴각하고 

제2차 고수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을지문덕의 행방은 수나라와의 전쟁이후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죽을은 알 수 없으나 7세기 초반에 사망

했을것으로 추정됩니다.을지문덕은 고구려가 멸망한뒤에도 명장으로서의 칭송을 받았습니다.고려 현종 시대에는

평양 근처에 사당을 세웠으며,1680년 조선 숙종 또한 그에게 사당을 내렸습니다.역사가 신채호는 그를 두고 

한구의 위대한 명장이라고 칭송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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