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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도산 안창호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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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그는 1878년에 조선 평안도 강서군에서 태어났습니다.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에게 한학을 배웠습니다.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189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그리하여 도산 안창호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가

세우고 밀러 목사가 경영한 구세학당에 입학하였고 부인 이혜련여사는 장인의 허락하에 정신여학교에 입학

하였습니다.졸업 후 사회로 나온 20세의 청년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를 맡게 되었습니다.평양부 쾌재정에서 평남 관찰사 조민희와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면서 청년 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습니다.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 탄포리교회를 선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사업을 추진 하였습니다.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선진 교육을 공부하여 교육전문가가 되고자 190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유학생 신분이던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이 빼앗자 1907년 도산안창호는 귀국하여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운동 외에도 1904년 의친왕,정재관 등과의 공립협회 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 등과 서북학회 창립등으로 민족운동을 하였습니다.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습니다.도산 안창호는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습니다.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였습니다.1909년 하얼빈 역의 안중근 의거와 관련하여 안창호는 평양 대성학교
에서 체포 되오 용산 헌병대에서 취조 받고 수감되었습니다.그 해 말 석방되었지만 다시 재소환되는 등 안창호와
신민회 지도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감시 당했습니다.신민회 회원들은 더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닫고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국외의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강기적 독립전쟁론을 구국 전략으로 채택했습니다.도산안창호는 1910년 신민회 회원들과 국내를 탈출하여
망명길에 올랐습니다.중국 칭다오의 첫망명지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되었고 북만주에 무관학교의 계획이
무산되면서 미국으로 방향을 변경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한 도산안창호의 노력은 끝이 없었습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 동맹을 결성하려던 도산안창호는

이듬해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으며 두차례 옥고를 치른뒤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사망당시 자신이 총애하던 애제자 유샹규의 묘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시신은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으며,1973년 도산공원으로 묘소가 이장되었습니다.안창호가 망우리에 묻힌후 수주일간

양주경찰서는 묘지입구에서 방문객을 일일이 신문하였고 그휴 1년간 묘지기에게 안창호의 묘를 묻는자의 주소와

이름을 적게 하였습니다.그만큼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존경받는 안창호를 그가 죽은 뒤에도 무서워했고 그 묘소를

찾는 국민들을 경계하였던 것입니다.도산 안창호 선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실력양성론의 핵심은 외세

침략으로 더이상 민초들이 피흘리지 않도록 국방력을 강화하여 준비태세를 갖추는 일이며 더이상 자신과 같은

독립운동가가 조국의 형편을 알리러 미국땅을 밟지 않도록 외교력을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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