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은 1898년 9월28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여 1910년에 인근 동앙중학 2년에 편입 하였습니다.1913년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
하면서 중국에서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1919년 길림성에서 양건호,한봉근,곽재기,김옥 등과 회합하여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국내의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 투쟁 활동을 벌였습니다.단원은 김원봉,곽재,양건호,윤치형 등13명 이었습니다.
1926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되어 황포군관학교 군관단에 배속되었습니다.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을 벌였지만 분열 되었습니다.민족혁명당의 노선과 당수 김원봉에 반대하는 공산
주의자 최장익은 1938년 조선 청년전위동맹을 창건 합니다.1942년 김원봉은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됩니다.
1942년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나갔습니다.1944년에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
하였으며,1945년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 하였습니다.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 하였습니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 약법기초위원으로 활동 하였습니다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하였는데,그의 월북에 대해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을 비롯해 진보성향의 인물들은
친일파들의 탄압에 못이겨 월북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한편 상해에서 김원봉과 대면한 황용주 전 MBC
사장은 김원봉의 월북에 대해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 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약산 김원봉은 북행하기
전 박헌영을 자주 만나는 눈치였다며 아마 그의 북행에는 박헌영의 끈질긴 권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
합니다.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김원봉은 전쟁을 반대하였습니다.남침하여 두달의 빠른 시간 안에
점령할 병력이 충분치 않아 미군이 참전할 것이고 남북이 서로 이득없이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할 것이라는 조언을
하였으나 김일성은 듣지 않았고 결국 전쟁이 발발하여 김원봉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5명이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군군에 의해 총살 당합니다.그의 아버지 김주익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그과정에서 동생 김봉철,김학봉만이 살아남았습니다.한국 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에 가요허요 1952년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과 지도일꾼 이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노력훈장을 수여받습니다.
김일성은 종파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 독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김일성파를 제외한 당시 북조선 체제 내의
마르크스주의,민족주의 계열 인사등을 숙청하기 시작합니다.김일성은 1958년 김원봉 및 기타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을 반체제적 인사로 규정합니다.김원봉은 1956년 종파 사건을 계기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원직에서 해임되었고 1958년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어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합니다.그후 탈북을 시도했지만 결국 체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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