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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안중근 의사 업적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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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출신 입니다.진해 현감이였던 아인수의 손자였습니다.3남1녀 중에 맏아들이었으며,아내인 김아려도

있었습니다.해외생활 중에는 안응칠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7세 때에는 황해도에서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아이들과 사서와 사기를 읽으며 공부했다고 합니다.화승총을 메고 사냥해서 명사수로도 광장히 유명 했었습니다.

1906년 삼흥학교,돈의학교를 운영 서북학회에 가입 후 1907년 연해주로 넘어가 의병에 가담했고 국채 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활동을 하였습니다.국외에서는 의병부대를 창성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계동청년회 임시

사찰에 선출합니다.8월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하게 됩니다.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하게 도비니다.6월 안준근 의사는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 사령관으로 함경북도 일본군 주둔지를 습격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 중에 단지 동맹이라고 있습니다.1909년 자신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 동맹을 결성

합니다.빼앗겨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 하였습니다.그것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왼손의 약지를 

끊었습니다.그리고서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 독립을 새겼다고 합니다.단지 동맹에서 계획한것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암살하는 것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였습니다.히토 히로부미는 대한민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활동하던

앞잡이 였습니다.안중근 생애 업적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다가 옵니다.이토히로부미가 1909년에 러시아 회담을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하게 됩니다.역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가 말을타고 러시아군의 의장대 앞을 지나갈때,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안중근 의사는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어 이토 히로부미에게 방아쇠를 당깁니다.이토 히로부미는 그자리에서 즉사

하였고,안중근은 옷안에 가져온 태극기를 꺼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이후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안중근 의사는 일본 관헌엑세 넘겨져 뤼순에 위차한 일본 돤동고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6회에 걸쳐 재판을 받게 됩니다.일본인들에게 심문과 재판을 받으면서도 안중근 의사는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법정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를 지적하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 이라며 거사의 이유를 천명 하였으나 일본 법원은 1940년 2월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안중근의 어머니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아픙로가라는 편지와 수의를 지어 보냈다고 합니다.불공정한 재판과정

이였지만 안중근은 공소하지 않고 옥중에서 지신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거사 이유를 담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입니다.동양평화론은 일본 군국제국주의 침략자가 축출되고 한국이 독립되면 동양에는 영원한 평화가

지속될 것이며,그러기 위해서는 한,청이 알차던굘햐여 함을 강조 하였습니다.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평소 생각하던 

구체적 방안을 기술하였으나 일제는 이것마저 허락하지 안았습니다.사형 집행이 당겨지면서 저서는 미완성으로 남았고,

1910년3월26일 오전10시 뤼순감옥 형장에서 순국하였습니다.정부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중 대한

민국장을 추서하였고 1970년 서울시 중구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안중근의 명언이 있습니다.첫번째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힌다"책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거친

말을 하게 되느 매일 공부와 독서에 정진해 지식과 교양을 쌓으라는"추구"라는 도서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그의 명언

으로 알려진 것은 대부분 그가 좋아했던 구절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일본인 간수였던 치바 도치시는 안중근에세 총을

겨누고 위협하기 일쑤였지만 안중근의 인품과 신념에 차츰 감동하게 되었고,일본이 당신 나라의 독립을 위협하게 된것은

미안한 일이오.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사과드리고 싶은 심정이오.라는 이야기를 햇다고 합니다.안중근은 그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 아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분분이라 라는 글을 써주었고 치바는 죽기 전까지 이를 가보로

감고 그의 위패를 모시라는 유언까지 남겼다고 합니다.

31세 그러니까 저보다도 훨씬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시면서도 신념을 잃지 안았던 도마 안중근 의사 후대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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