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청해진 출생으로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무장이자 해상 호족입니다.장보고의 정확한 출생과 계통은
알 수 없으나 7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장보고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고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타고 났습니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장보고의 본명을 궁복 또는 궁파라고 적고있습니다.일찍부터
친구 정연과 함께 당의 서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
군중 소장의 직책을 받았습니다.83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참상을 전하며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줄 것을 청합니다.흥덕왕에게 승인을 받고 1만여명의 군대를
확보한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새우고 대사가 됩니다.대사는 일종의 총독으로 정해진 지역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우두머리 입니다.청해진 설치의 표면적 이유는 신라해안에 출몰해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납치하여 당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해적을 소탕하는 것이였습니다.실제로 방보고는 신라와 당 해상교통로에 있는 해적을 말끔히
소탕 하였습니다.해적토벌에서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습니다.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상동성
문등현에 신라인들이 법화원을 건립하려 하자 장보고는 이를 적극 지원합니다.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 되돌려 받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방보고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 전반 산동 반도의 항구도시였던 적산 지금의 룽청시에는 장보과와 연계한 당시 많은
신라 상인이 거류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이곳에 적산 법화원을 세웠는데 이무렵 당 조정의 명령으로 서둘러 귀국
해야만 했지만 당에 남아서 천태종을 배우기로 결의한 일본의 입당청익승 엔닌을 위해 그를 적산 법화원에
머물도록 배려하고 현지의 중국 관인들과 교섭해 공험을 얻어내주기도 하는등 엔닌의 9년에 걸친 구법행을
물신양면에 걸쳐서 지원했습니다.장보고는 난화라는 딸과 살고 있었는데 김우징의 아들 경응과 장보고의 딸
난화는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당시 신라조정에는 또 왕위를 둘라싼 분쟁이 생겨 희강왕이 자살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는데 그 혼란을 틈타 장보고와 그의 군사들이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큰 공을 새웁니다.
그가 신무왕입니다.김우징의 승리와 영과은 장보고의 공이였습니다.그러나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장보고
에게는 큰 벼슬이 내리지 안았습니다.신무왕은 임금 자리에 오른지 7계월만에 병을 얻어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 경응이 뒤를 이어 문성왕이 됩니다.장보고는 문성왕에 의하여 진해장군이 되었습니다.문성왕은 옛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 하였으나 왕족과 귀족들이 반대를 하였습니다.딸 난와가 신분
때문에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결정이 난 것을 안 장보고는 분노를 참지 못해 군사들에게 출정명령을 내리는데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자객 염장을 보냈습니다.염장은 청해진에 머물때 장보고와 잘아는 사이였습니다.장보고는
신의를 지켜 반갑게 대접하였으나 염장은 장보고를 살해합니다.딸이 왕비가 되는날을 기다리며 세월을 참고 기다린
장보고는 이렇게 일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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