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 입니다.원효대사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 대사에 비견됩니다.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개벽을 열아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에 압량군
불지촌에서 태어났습니다.원효대사의 아명은 서동 입니다.서당은 첫게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가강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습니다.원효대사는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합니다.그러나 태어나면서 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습니다.불교가 공인된지 100년이 지나던 이무렵 신라에는 적지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습니다.원효대사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원효대사의 눈에 비친 인생은 허무하고 의문투성이 였습니다.도대체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원인은
무었인가.부귀영화를 위해서 온각 짓을 다할뿐만 아니라 심지에 싸우고 죽이는 이치는 무었인지 결국 그는 그러한
인간의 괴로움을 떨쳐 버리고 진정한 불도를 깨우치고자 머리를 깍게 되었다고 합니다.중이된 원효는 집안 사람인
의상 대사와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떠납니다.그러나 고구려 국경에서 붙잡혀 실패하고 11년뒤인 661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떠납니다.원효대사는 밤에 목이말라 모리맡에 있는 물을 아무 생각없이 마시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그것은 해골에 담겨진 썩은 물이였습니다.구역질을 하던 원효대사는 순간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의상은 그대로 당나라로 갔고 원효는 다시 신라로 돌아왔습니다.진리를 깨달은 마당에 당나라까지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원효대사가 신라로 돌아와서 지은노래가 바로 무애가 입니다.마음에 꺼리낌이 없으면 자유롭고
행복해진다는 내용입니다.이후 원효대사는 불경을 쉽게 풀어 쓴 책을 엮어 내면서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 합니다.
원효대사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직접 불교의 참끗을 전했습니다.원효대사의 이름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까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원효대사는 중의 몸으로 진평와의 딸인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14일만에 헤어지기도 했습니다.그때 낳은 아들이
바로 설총입니다.설총은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도 유명했습니다.
원효대사의 업적 중 매우 중요한 것중 하나는 정토신앙의 보급입니다.원효대사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쥐족불교와의 인연을 끊고 방방곳곳 세석을 돌아다니며 평민들과 어울렸습니다.현실적으로 고통받는 민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형이상학적인 이론보다는 정토를 지향하는 염원으로 삶을 헤쳐나갈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오랜 세월 전댕과 압제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의망을 잃어버린 대중들에게 그는
정토의 희망을 제시하였습니다.그가 적극 전파하여 뿌리내린 정토 신앙은 일종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이제까지
왕실 귀족과 일부 유식한 승려 등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였던 불교는 이제 대중의 손에 넘어오게 됩니다.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원효대사에 의한 정토 사상의 보급은 억압받는 대중과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대개가 정토신앙을 믿었습니다.그리하여
정토 사상은 삼국통일을 앞둔 상황에서 나라를 정신적으로 통일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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