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난이라고 하면 당연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입니다.병자호란은 말그대로 병자년에 호국과의 전쟁을
한 난입니다.병자호란은 호국과의 전투이며,여기서 호국은 오랑캐 즉 당시 청나라를 뜻합니다.병자호란 전쟁의
원인은 당시 궁국사와 연관도 있습니다.중국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이어집니다.청나라는 과거 금나라에서
국호를 변경한 것입니다.금나라는 과거 여진족이고 만주족입니다.여진족은 조선에서 오랑캐라 불리었고 중국내에서도
변방이고 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친명배금책 명나나를 친히 여기고 금나라를 배척시킨다.
라는 조선의 행동에 청나라의 태종이 화가 나서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 입니다.사실 인조가 명나라를
사대하고 새롭게 일어난 청나라를 배격하다 일어났다고 생각을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절대로 당시 조선은
청나라를 추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인구 1억이 넘는 명나라에 비해 100~200만의 청나라는 정말로 한줌의
모래밖에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병자호란은 조선에도 문제가 있습니다.병자호한 당시 조선은 당시 군대가 12만에
달했고 청나라의 침입에 나름 대비를 안한것은 아니였습니다.
조선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청나라는 거칠것없이 한양으로 들이 닥쳤고 청나라의 군대가 한양에 가까이 왔음을
알았던 인조는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신 합니다.청나라의 대군을 앞에 둔 상황에서 남한산성에서는 신하들이
두편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습니다.청나라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청나라에 항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 졌습니다.조선이 항복하겠다는 의견을 전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임금이 직접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 하였고 이를 거부할 힘이 없던 인조는 스스로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을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입은 상처를 극복하기도 전에 다시 벌어진 청나라와의 전쟁인 병자호란은 한반도 곳곳에 극심한
상처를 남겼습니다.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후 청나라의 무리한 조공 요구에 조선 왕실과 백성의 삶은
점점더 여려줘져 갔습니다.병자호란이 끝나자 청나라는 조선의 두왕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낼것을 요구 합니다.
소현제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됩니다.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잡혀 있는 시간동안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청나라와 많은 일을 논의합니다.또한 소현세자가 머물고 있는 집에는 청나라 사람 뿐만 아니라 서양 사람까지
드나들었으며 그들은 소현세자에게 새로운 문물을 선보이기도 하였습니다.병자호란을 통해 힘이 없는 나라가 겪는
어려움을 잘 알았던 소현 세자는 청나라에 있는 동안 나라를 강하게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됩니다.소현세제의
이런 생각은 인조를 매우 불안하게 하였습니다.인조는 명나라와 청나라 둘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편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사람으로 청나라를 가까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이렇게 임금이 된 인조에게
소현세자의 생각은 분편한 것이었습니다.인조는 병자호란 후 겉으로는 청나라를 섬겼으나 속으로는 치욕스러워했지
때문에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점점 불편해지게 됩니다.그후 소현세제가 조선으로 돌아왓으나 얼마후 죽게되고
봉림대군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됩니다.이가 바로 효종입니다.병자호란으로 겪은 고통일 잊지 않고 있던 효종은
군대를 키워 청나라를 치고자 하였는데 이를 북벌운동이라고 합니다.하지만 나라의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군대를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또한 군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세금이 필요한데 그것은
고스란히 백성의 부담이 될것이기 때문에 북벌운동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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