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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허준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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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자는 청원이며 호는 구암입니다.본관은 양천입니다.안타깝게도 허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온 서적은

없습니다.그이유는 허준은 신분상 양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허준은 우리 역사상 한의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분이지만 철저하게 양반사회였던 조선시대에 그의 집안의 족보에 재대로 오르지도 못했습니다.허준의 부친은

양반이었지만 모친은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양천 허씨 가문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조선시대는

양반,중인,상민,천민의 계급으로 그신분을 나누어 차별적인 대우를 했습니다.허준처럼 양반과 그 밖의 신분에서

태어난 아들을 서자라고 합니다.서자는 원칙상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기 때문에 어머니가 천민이면 아들도 천민

입니다.아버지가 군수여서 어깨 너머로 학문일 익혔고 노비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를수 없었습니다.아버지의

도움으로 노비에서 풀려나 중인이 될수 있었습니다.중인돼서 새로운 삶을 살던 허준은 고향을 떠나 유명한 의원

이였던 유의태를 찾아가 의술을 배웁니다.의술 공부에 전념하던 허준은 젊어서부터 이미 가난한고 병든 백성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어 주위의 신망을 얻기 시작했습니다.허준은 일찍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10대에 이미 중앙으로

상납하고 약재를 검사하는 심약이라는 종9품 관직에 임명됩니다.허준은 1571년에 종4춤인 내의첨정에 올랏다가

1575년 의과에 정식으로 합격하고 어의로 선발됩니다.갓 서른의 나이에 의원으로서 확실하게 지위를 굳힌 셈입니다.

이때부터 왕실 진료를 함에 있어 많은 공적을 세우기 시작했고 결국 선조의 절대적인 심인을 얻게 됩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허준에게 큰 전환점이 됩니다.왜군은 부산포에 침입한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믿었던 신립마저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자 선조와 조정은 개성을 향한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습니다.이때허준은 어의로서 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갔습니다.당시 양예수가 노쇠하여 47세의 허준이 어의로서

그 소임을 대행햇던 것입니다.그는 피난길에 잠시도 국왕의 곁을 더나지 않고 건강을 돌본 공로로 선조가 대궐로

귀환한후 또 다시 품계를 올려 받았습니다.한성으로 돌아오면서 목격한 조국의 신하는 전란으로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이를 지켜본 허준은 이들을 치료할 방도가 시급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허준은 선조의 명을 빌려 모든 병을 치료하는 방안을 수록한 의학서를 편찬하기로 

합니다.전쟁이 끝나고 내의원도 다시 정비되자 선조는 허준에게 중단되었던 의학서 편찬 작업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그때부터 허준 혼자서 작업을 수행 합니다.ㄱ,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500여권의 의학서를 참조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의원으로 승승자구하던 허준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선조가 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군왕의 주치의로서
치료에 잘못이 있다 하여 집중적인 탄핵을 받게 됩니다.결국 허준은 삭탈관직된후 유배됩니다.하지만 그는 좌절을
겪으면서도 새로운 의학서 집필에 대한 의지를 꺽지 않고 연구에 몰두합니다.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그동안 연구햇던
새 의서 저술을 마무리 지었고 마침내 작업에 착수한지 15년만에 방대한 불량의 동의보감이 완성 됩니다.이에
광해군은 포고문을 내려 그 공로를 치하하고 상으로 태복마를 하사합니다.동의보감은 그후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간되었습니다.중국에서 풀판될 때 그 서문에 천하의 보물을 마땅히 전세계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적어
극찬하였고 일본에서도 의가의 비급으로 소중히 떠받들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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